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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영어만 잘하는 바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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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영래 작성일05-09-15 10:29 댓글1건 조회9,4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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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서울에서 오랜 미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사람과 점심을 먹게 되었다. “무얼 먹을까요”라고 했더니, 그는 “햄버거 빼고는 다 좋다”고 했다. 햄버거와 무슨 원수를 졌기에? 유학 초기에 영어가 서툴러 샌드위치를 주문하지 못해서 죽도록 햄버거만 먹었던 쓰라린 기억 때문이란다.

이해가 간다. 샌드위치 재료를 앞에 두고 점원이 “어떻게 해드릴까요”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면 “흰 빵으로 그리고 안쪽에 버터를 바르고 이러저러한 햄과 야채를 넣고 겨자를 바르고….” 이런 식으로 한없이 설명해야 한다. 막 한국을 떠난 사람이 김밥이라면 모를까 샌드위치를 제대로 주문하기는 어렵다. 거기다 성질 나쁜 점원이 퉁명스럽게 “뭐라고?”라고 되묻기라도 하면 기가 죽어서 “됐어요. 그냥 햄버거 주세요” 했다는 이야기는 이 사람말고도 여러 명에게서 들었다.

결국 영어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먹었다는 이야기인데 사실은 샌드위치를 어떻게 만들어 먹는지 몰랐던 것이 더 문제였다. 수십 년 전에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근무했던 한 외국인은 한국어를 배운 뒤 남의 집을 방문할 때 문패를 보고 이름을 부르며 대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어느날 대문에 커다랗게 쓰인 이름을 보고 ‘개조심’씨를 정중하게 찾았다고 한다.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국어란 이렇게 허약한 것이다. 사실 외국인이 한국어를 아무리 유창하게 잘한다 해도 “우리가 어릴 때 ‘마징가Z’와 ‘아톰’이라는 만화를 봤는데…”라고 하면, 단어를 몰라서가 아니라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서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다.

미국에 온 초기에는 일요일 브런치 모임 같은 것이 제일 괴로웠다. 사람들은 한가할수록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 초점 없는 대화 속에서 의미를 찾아 맞장구를 치는 것은 대학강의 듣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TV도 그렇다. 뉴스는 말이 어려워도 내용을 대강 아니까 알아듣기 쉬운 반면, 훨씬 더 쉬운 단어로 말하는 드라마나 토크쇼를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생활과 문화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요즘도 신문을 읽을 때 하루에 영어단어를 10개도 더 찾는다. 새 사건이 터지면 새 단어가 나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처음에는 그걸 일일이 정리해서 들고 다니며 외운 적도 있는데 요즘은 포기했다. ‘외국어란 그런 것이려니’ 하고 잊어버리기로 했다.

얼마 전에 오랜만에 만난 미국 친구가 “영어가 많이 늘었다”고 칭찬해주었다. 내가 “하지만 아직도 영어로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해”라고 하니까, 이 친구가 “미국 사람인 나도 영어로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는데 네가 어떻게 하겠어”라고 해서 한참 동안 속시원하게 웃었다. 진짜 크게 위로가 됐다.

최근 어느 한국기업에서 인사 업무를 담당했던 친구에게 “요즘 젊은 사람은 다 영어를 잘하지?”라고 물었다. 그는 “‘오 마이 갓(Oh, My God)’ ‘웁스(Oops)’는 미국사람처럼 하는데 정작 그 유창한 영어로 말하는 내용은 알맹이가 없어서 실망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는 “실력, 근성, 성실성, 지식, 이런 것이 다 갖춰졌을 때 비로소 영어가 돋보이는 것”이라면서 ‘영어 잘하는 바보’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동감이다. 나도 영어와 부대껴온 오랜 시간을 통해, 역시 형식보다는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강인선 조선일보 특파원(insu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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